[역사] 강감찬 귀주대첩, 바로 알기 / 고려거란전쟁 역사

 

드라마[고려거란전쟁]이 인기를 끌고, 최수종 배우님의 연기대상까지 물흐르듯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데요.

 

고려거란전쟁의 배경이 되고 있는 귀주,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귀주 대첩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귀주 대첩이 어떻게 일어나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오늘은 귀주대첩에 대한 이야기를 써볼게요. 비전문가이다보니 조금은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어요!

 

 


귀주대첩 이란?

 


귀주대첩은 1019년 3월 10일에 고려의 상원수였던 강감찬 장군이 요나라의 소배압을 총지휘관으로 한 10만 명의 대군을

귀주(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크게 무찌른 전투입니다.

 

고려측 20만 명 이상, 요측 1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이 평야에서 맞붙은 총력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고려-거란 전쟁의 일부입니다.

거란(요나라)의 성종이 고려의 현종에게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를 하면서,

발발한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요나라는 고려를 침략하는 야망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평화적인 국교가 성립되었습니다.

 


귀주대첩은 어떻게 일어났나?

고려거란전쟁의 소배압과 강감찬 장군

 

1018년 12월, 요나라의 소배압은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원수로, 병마판관에 김종현을 임명하여 20만 8천 명의 대군으로 맞섰습니다.

 

고려군은 흥화진, 자주, 신은현 등에서 요나라군을 연이은 전투에서 격파하고, 추격하면서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습니다.

요나라군은 개경(현재 개성)을 목표로 했으나, 개경의 방어가 왕성하다는 첩보를 듣고 후퇴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고려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배치한 기병대는 금교역에서 고려군의 습격에 전멸했고,

연주에서도 고려군의 기병에게 대패했습니다.

 

결국 요나라군은 귀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상원수 강감찬은 귀주에서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주대첩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양군은 힘을 다해 싸웠고, 쉽사리 승부가 갈리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개경에서 거란군을 추격하며 올라온 김종현의 철기 기마부대가 거란군의 후진을 습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렸고,

연주에서 승리한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 1만 4천 명이 귀주에 도착하여 거란의 중심으로 돌격 했고, 거란군을 완전 포위 및 섬멸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참패하고 북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강민첨 장군과 기병이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거란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요나라의 성종은 크게 노하여 소배압을 사형하려고 했으나,

고려의 강감찬이 소배압을 사면해달라고 청하자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귀주대첩에 대한 블로그 글을 마칩니다. 강감찬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억해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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